깨달음을 알려주는 가르침들

생활수행 - 혜봉 오원칠 법사 | 2016. 제6호
 - 모두 깨어나 세상의 주인으로 사는 법 

가주생협에서 운영되고 있는 '마음공부' 모임(출처: 가주생협홈페이지)

 요사이 한국 불교는 안팎으로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변화들을 보면 교단 현안도 있고 수행과 관련된 것도 있다. 이 변화들을 보면 일부에서 회자 되는 것처럼 사람에 따라서 대단히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있고, 시대를 관통해서 통찰의 지혜를 주는 것도 있다.   
   

 불교가 무엇인가, 불교는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필자는 오랫동안 수행과 관련된 일들에 몸담아 왔던 경험에 비추어 시사적이고 사회적인 것들 보다는 아무래도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듯하다. 필자가 수행에 관심을 가졌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 30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당시 80년대는 사회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때이고 개인적으로는 불교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불교는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을 하던 때이다.  
 특히 내적으로 마음에 중심이 잡히지 않아서 마음의 중심을 잡는 일, 즉 수행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행에 관심을 가지면서 스승들을 찾아다니고 경전이나 선어록들을 읽으면서 불교와 수행에 대해 탐구하곤 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렀다. 
 


 지금 이 시점에서 수행법이라는 과제를 않고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여러 가지 경험도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경전에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들과 조사들의 어록들 그리고 스승들의 가르침들 중에서도 수행에 기본 바탕이 된 것들이 생각나서 이를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 도움이 된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계산해서 선택하지만 않는다면”  

 “선은 밖으로 상(相,모양)과 관념(마음)을 떠나고 안으로는 혼란이 없는 것이다.”
 “마음을 깨닫고 싶으냐? 그러면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알고, 배부르면 배부른 줄 알고, 잠 오면 잠 오는 줄 알고, 보면 보는 줄 알고, 들으면 듣는 줄 알고, 말하면 말하는 줄 아는 그 마음을 깨달으면 된다.” 

 앞의 두 말씀은 신심명과 육조단경을 통해서 마음에 심어졌던 3조 승찬과 6조 혜능 스님의 말씀들이고 세 번째 말씀은 봉암사 조실이셨던 서암스님께서 살아계실 때 직접해주신 말씀이시다.  그런데 필자는 이 말씀들을 이해하고 소화되는 데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밖으로 어떻게 상을 떠나고 관념을 짓지 않는지 안으로 마음을 어떻게 혼란하지 않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금강경에서는 “상을 취하지 않으면 마음에 흔들림이 없고” 상을 취하지 않으려면 “만들어진 모든 법(조건에 의해 생겨난 모든 현상)은 꿈같고 환영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니 마땅히 이렇게 관하라”고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관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렇게 관이 되는지를 몰랐다.


 법구경을 보면  “그가 나를 때리고 욕했다. 나는 그에게 맞았고 욕을 먹었다라고 생각하면 고통은 끝나지 않는다.” “그가 나를 때리고 욕했다. 나는 그에게 맞았고 욕을 먹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고통은 없다.”

 “볼 때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하고, 느낄 때는 느끼기만 하고, 생각할 때는 생각만하라. 그러면 그 곳에는 자아가 없고, 자아가 없으면 고통이 없는 열반이네.”라고 하셨다. 이러한 가르침들도 머리로만 이해되었지 가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호흡을 관찰하면서 분명히 알아차리며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을 관찰하면서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마음을 관찰하면서 분명히 알아차리며 마음 챙기며 머문다.” “법(심리현상)을 관찰하면서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라고 하는 사념처(四念處) 수행을 행하면서 모든 의혹들이 사라졌다. 물론 이 과정에는 국내외 스승들의 가르침들도 법을 이해하고 깨닫는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과정을 생략하겠다.

 아무튼 모든 의혹들이 사라지면서 ‘계산하여 선택하여 판단하지 않으면 도를 아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말씀이나, ‘밖으로 상과 관념을 떠나고 안으로 마음에 혼란이 없는 것이 선’이라는 말씀이나, ‘누군가가 욕하고 때렸을 때 생각이 없으면 고통이 없다.’는 말씀이나,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느낄 때는 느끼기 만하라. 그러면 자아가 없고 자아가 없으면 고통이 없다.’는 말씀이나, 금강경에서 ‘상을 취하지 않으면 마음에 흔들림이 없다는 말씀이 모두 다 한 말씀으로 이해되었다. 
  아울러 아는 마음 즉 알아차리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 본래 상태 즉 번뇌가 없는 청정하고 모양이 없고 자아가 없는 마음을 깨닫는 마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부처님으로부터 선을 가르쳤던 스승들이 모두 하나를 말씀 하셨다. 즉 번뇌가 없고 자아가 없는 청정한 마음을 깨닫고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말씀 하셨던 것이다. 
 

 소승, 대승, 선 놓고 다투는 것은 젓가락, 숟가락, 포크 놓고 무엇으로 음식 먹을까 다투는 것과 같아
 따라서 필자는 근본불교니 상좌부니 소승이니 대승이니 금강승이니 선이니 하는 것은 모두 이름이요 모두가 해탈과 열반을 가리키는 언어들이고 방편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근본불교니 대승이니 선이니 하면서 맞다 틀리다 하는 것은 젓가락과 숟가락 그리고 포크를 놓고 음식을 먹는데 이것이 옳다 저것은 틀렸다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각각의 도구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몰라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이지 그 용도를 바르게 알면 모든 도구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 유용한 것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하면 바로 알게 되는가. 자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삶에서 일어나고 경험되어 지는 것에 주의를 두고(마음 챙기고) 알아차리기를 해보라. 
 예를 들면 ‘지금 분노가 들끓고 화가 나고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몸에 열이 나고 손발이 떨리고 머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고 몸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고 앞날이 감감하고 마음이 무거울 때 몸과 마음에 주의를 두고 알아차리기를 해보라’ 
 ‘누군가 비난하고 욕하고 무시할 때 자존심 상하고 해를 입힐 때 이때 역시 자신의 몸과 마음에 주의를 두고 알아차리기를 해보라’ 
 
 대상을 보면서 알아차리면 남방 위빠사나요.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대승 위빠사나요. 대상을 보면서 대상에 반응하는 이 마음은 무엇이며 이렇게 아는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바탕과 온갖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그 바탕을 보면서 생멸이 없는 이것은 뭔가 하면 이것이 화두이고 이 알아차리는 마음 즉 자각하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 선이다.

 
누구든지 이와 같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경험들이 일어 날 때 자신의 몸과 마음에 주의를 두고 그 현상 즉 몸의 현상이든 마음의 현상이든 어떤 의도나 애씀 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 주의를 두고 알아차리면서 그 모든 것을 경험해보라. 그리고 무엇이 일어나는지 피하지 않고 그 모든 현상들을 알아차리면서 지켜보라.


 그러면 모든 것은 조건 지어진 현상 즉 연기된 현상 이며, 어떤 것 도 지속 되는 것 없고 지속 되지 않기에 만족 할 수 없고, 만족 할 수 없기 때문에 고통 이며, 만족 할 수 없고 고통스러운 이 현상 속에는 독립적 자아나 자성이 없음을 경험하게 되고 깨닫게 된다.

 또한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을 돌이켜 보고 알아차리면서 관찰해보라. 인식하는 마음에는 그  마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실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실재하는 것이 없다면 인식하는 마음에는 무엇이 있겠는가. 마음이 인식한 온갖 현상과 일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낸 환상이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임을 경험하게 된다. 즉 몸과 마음은 조건 지어진 일시적 현상이며, 자아는 개념과 이미지가 만든 마음의 산물이며, 모든 고통은 마음이 대상에 반응하여 생긴 실체가 없는 환상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욕망과 무지의 삶에서 벗어나 당당한 진리의 주인으로 깨어나야 

 이를테면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최순실-박근혜 사건도 보면 이와 다르지 않다.  그동안 최순실도 박근혜도 정치권도 우리국민 모두가 자신이 만든 환상에 빠져서 지금 이 난리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이러한 일들은 자신이 살면서 직 간접으로 경험한 것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이 만든 생각이고 이미지로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지도 않았고,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 판단과 능력이 없다는 사실과 최태민과 최순실의 말에 의존해서 사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고 그것이 자신의 마음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또한 최순실과 함께 국가권력을 사유화한 자신의 행위가 대통령으로서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해서 아무 잘못이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게 될까?


 물론 박대통령이 자신의 행위가 잘못 되었다고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각이 다만 생각인 줄 모르고, 자신이 하는 말이나 행위가 옳은 줄 알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친박도 조중동도 우리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조심하고 조심할 일이다.

 우리 자신이 박근혜와 최순실과 무엇이 다를까. 우리 자신에게 박근혜와 같은 두려움과 무지로 김기춘 우병우 이정현과 같은 사람들이 무지와 사적인 욕망으로 리더가 되려고 하고 출세를 하려고 하고 성공하려는 마음이 정말로 없을까.  종교의 이름으로 법치라는 미명으로 세상을 미혹시키는 일은 없는가. 없다면 누가 이러한 사회를 만들었는가.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런 허물이 없을까. 이렇게 모두가 다 괴로운 이유는 무엇이며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 우리 모두 욕망과 무지의 노예로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당당한 진리의 주인으로 깨어나야 한다. 우리 모두가 보고 듣고 숨 쉬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깨어서  본다면 박정히 대통령을 좋다고 생각하거나 싫다고 생각하는 것도, 노무현 대통령을 좋다고 생각하든 나쁘다고 생각하든, 우리 자신의 마음이 만든 개념이고 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몇몇 소수의 권력자나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잘했다 못했다 하며 분노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박정희는 박정희이고 노무현은 노무현이다. 그러나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부자도 가난한자도 판사도 검사도 회장도 노동자도 진보도 보수도 모두가 조건에 따라 붙여진 이름일 뿐 본래부터 그러한 이름을 가진 존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출가자나 재가자 중생과 부처 그 어떤 존재도 예외가 없다. 그 어떤 것도 집착하면 미혹이 된다. 윤회와 열반도 그러하다.


 숨은 그냥 들어오고 나가고 눈뜨면 보고 소리가 나면 듣고, 다만 이것일 뿐 따로 그 무엇이 없다. 미혹에서 깨어나면 그대로 부처와 같이 깨어난 사람이 된다. 그러니 모두가 깨어나서 지금 여기서 자신과 이 세상의 주인으로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임제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처한 곳에서 주인이 되는 것은 자신이 서있는 곳에서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선 자리에서 진리와 하나가 되어 자신이 처한 곳에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미혹함이 없이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모든 것을 깨어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리며 보고, 일체는 조건 지어진 것이며 조건 지어진 모든 것은 무지개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조건에 따라  해야 할 바를 바르게 실천한다면 이것이 진리를 여의지 않고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가가 안팎으로 혼란한 지금 모든 사람들이 무지에서 깨어나서, 깨어있는 마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게 되기를 염원하며 수행하여 생긴 모든 공덕을 이에 회향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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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봉 오원칠 법사
혜봉 오원칠 법사는 1956년 출생했다. 동국대 불교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법륜 스님과 함께 정토회를 설립, 정토포교원 원장과 정토수련원 지도법사를역임했다. 
현재 명상수행학교 행복수업 교장, 마음일보 부설 마음아카데미평생교육원 원장, 한국명상지도자협회 이사이며, ‘삶을 바꾸는 5가지 명상법’의 저자다. 


출처 및 전문보기:  http://webzine.newbuddha.org/article/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