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의 못 다한 역사속의 한국불교

2013.03.0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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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화의 못 다한 역사속의 한국불교

 

때로는 변혁, 때로는 호국의 한국불교사””

 

 

불교와 유교는 이 땅의 사상계를 오래 지배하면서 정치의 주체가 되어 대결을 벌이기도 하고 서로 타협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는 피지배세력으로 전락해서 모진 압제를 받았다. 이 속에서 불교는 현실 도피의 세계로 흐르기도 하고, 호국불교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타협을 모색하기도 했다. 때로는 변혁세력과 연결하여 활로를 개척하려 했다.

  

미륵파와 도참파의 대결

 

후기 신라 말기에 들어, 정치와 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고 사상계도 혼돈을 거듭하고 있었다. 왕실과 귀족은 사치와 방일(放逸)로 민심을 외면하고 있었으며, 민중들은 수찰로 인하여 유리되었고 지배세력에 당한 불신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불교는 중흥기에 이룩된 구산선문(九山禪門 : 선종의 여러 종파)이 각기 현실적 이익을 두고 반목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각지의 토호들은 왕실을 얕보고 세력을 떨치면서 발호화고 이었다. 이들 토호세력 중에 큰 위세를 떨친 것이 철원을 주심으로 한 궁예와 전주를 중심으로 한 진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미륵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거나 스스로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러 세상에 나온 미륵이라 자처했다. 이들은 용화회상(龍華會上 : 미륵불이 머무는 곳)의 이상을 이용하여 민중들에게 꿈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민중들이 새로운 세상의 실현을 희구하는 현실에서 미륵불이라는 이미지를 이용해 민중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을 벌이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써먹기에 충분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민심은 왕실에서 더욱 떠나 새로운 세력으로 기울어졌다.

이때 왕건은 궁예와 진훤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이미지 조작을 시도했다. 곧 운수의 필연적 귀결을 내세운 것이다. 천명을 받은 인물이 천명에 따라 인간의 일을 맡게 되는(天人相應) 미래 예언의 도참설을 정치기반의 확충에 이용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도선을 통해 왕자의 탄생을 예언하게 하고 그 자신은 쌀 서 말(중국에 오두미교가 있었음)로 비결을 사서 왕자의 계시를 받았다는 따위로 민심을 휘어잡았다.

왕건은 미륵 출현으로 돌아가는 민심을 도참설로 되돌려 놓는데 성공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고서는 도선이 만든 도참설을 더욱 퍼뜨리고 그 자신도 이를 굳게 믿으면서 왕권의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초전불교(初傳佛敎)의 선종교종화엄사상 중심에서 왕건은 새로이 도참에 근거한 비보설(裨補說)을 더 보탰다. 그는 우리나라의 흉한 산수를 비보하여 그 힘으로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전국의 산수 좋은 곳에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 는 이 과정에서 선승들을 동원하여 왕권 확립의 이론을 확대하였다. 따라서 비보사찰은 군사로나 경제로의 기지로 활용될 수 있었고, 선을 군신 상하의 질서 단계로 체계화했다. 또 화엄학이, 진훤을 추대했던 지리산 화엄사 중심의 남악파(南岳派)와 이를 반대하는 태백산 부석사 중심의 북악파(北岳派)로 갈라졌던 것을 북악파 중심으로 교종 계통을 개편했다.

한편 유학은 후기 신라 뒤에 정치기구나 제도도 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다가 고려에 들어와 과거제의 확립으로 통치철학으로까지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유학자들이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면서 불교를 억제하고 나섰다.

  

글귀만을 찾아 헤매는 미친 개와 침묵만을 지키는 미친 지혜

 

12세기에 접어들어 나라는 외환에 시달렸다. 만주지방에서 일어난 금나라는 송나라를 쳐 중원을 자치하고 있었다. 고려에서는 유학자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중국 중심적 사대주의를 지향했다. 이에 반하여 묘청 등은 개성에서 평양으로의 천도를 주장하고 칭제건원(稱帝建元)으로 자주노선을 내걸었다. 사대파들은 이를 반대하고 고려를 제후국으로 전락시켜 현실안존의 정책을 밀고 나갔다. 묘청 등은 유학자들이 주도하는 중아 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며 대위국(大爲國)을 건설하려 했지만 김부식 등의 유학자들에게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 최초로 벌어진 유학파와 불승파의 무력대결이라 볼 수 있겠다.

그 뒤 유학자들은 중앙정계의 주도권을 잡았고 유학파와 불교파의 반목이 심화되었다. 한편, 불교 교단 안에서는 선종과 교종 양종이 날카로운 대립을 보였다. 왕실의 비호를 받는 교종 승려는 귀족화의 길을 걸으며 개인의 영달과 재산의 축적에 몰두하여 타락을 길을 걸었다. 선조 승려들은 지방의 호족과 연계하여 새로운 정치적 발판을 삼으려 했다. 이에 따라 양종은 갈등과 지리시가 더욱 격화되어 앞 시대보다 그 정도를 더했다.

양종이 자기들의 생각만이 옳다는 논란을 벌이며, 심지어 지혜와 참선만을 각기 내세우자 글귀만을 찾아 헤매는 미친 지혜(尋文之狂慧)”침묵만을 지키는 백치의 선객(守黙之痴禪)”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에 보조(普照)는 그 갈등을 해소하고자 많은 이론을 내기도 하고 많은 동조자를 포섭하기도 했다. 보조는 이렇게 지적했다.

 

돌이켜 우리 무리가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바의 자취를 보니 곧 불법에 기대서 아상(我相), 인상(人相)을 장식해서 이익의 길에 얽매이고 풍진의 일에 골몰하여 도덕을 닦지 않고 옷과 음식만 허비한다. 비록 출가하나 무슨 덕이 있으리오.

슬프도다. 대저 삼계(三界 : 중생이 사는 세계로 곧 욕계, 색계, 무색계)를 여의고자 하되 풍진을 끊는 행실이 있지 못하니 한갓 남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정부의 뜻은 없도다. 위로 도를 넓힘을 어그러지게 하고 아래로 중생을 이롭게 못하고 가운데로 사은(四恩 : 천지, 부모, 임금, 중생에게 받은 네 가지 은혜)을 저 버렸으니 진실로 부끄럽게 생각하노라……. - <정혜결사문>에서

 

당시 불승의 타락상을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보조는 동조자들과 결사하여 산림 속에서 은둔하면서 자수(自修)를 강조하였다. 보조는 강한 현실 대결을 나타내지 않고 수도자의 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적어도 적극적으로 현실개혁에 나서지 않고 불가 본래의 수도에 정진하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외침이 한 때에는 강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후세 불도들의 거울이 되었지만 현실에서의 타락상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더욱이 유학자 중심의 문신을 타도하고 정권을 잡은 무신이 등장하자, 선종 승려들은 여기에 참여하거나 결탁했다. 따라서 무신정권 아래에서는 유학자 출신의 관료와 왕실 귀족의 보호를 받은 교종 승려들이 선종 승려에 밀려났다.

선종 승려들과 무신정권은 서로의 이해와 목적을 가지고 결탁했다. 교종 승려들이 왕실의 비호에 나서자, 무신정권은 이들을 탄압하면서 무신귀족에 의한 기설질서의 반대세력인 선종 승려들을 옹호했던 것이다. 선종 승려들은 또 왕실 귀족에 대항하여 민중을 저변으로 한 수선사(修禪寺)백련사(白蓮社)의 전통을 이어갔다. 이런 서로의 관계는 커다란 외세 앞에서 또 한 번 모진 시련을 당해야 했다.

   

강경 성리학파와 온건 불교개혁파의 대결

 

원나라의 침입이 있자, 강화도록 들어간 고려 조정에는 두 가지 양상이 벌어졌다. 왕실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원과의 강화를 추진하려 했고, 무신정권은 원과의 항쟁을 계속하려 했다. 왕실이 끝내 원과 강화를 맺자 무신의 지위는 흔들렸다.

이에 무신과 연결된 수선사에 참여한 승려들은 모진 탄압을 받게 되었으며, 백련사는 고려 왕실과 원나라 황실의 원찰인 묘련사(妙蓮寺)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종은 다시 변질되어 왕실, 귀족과 결탁하여 민중세력과는 반대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일부 교종 승려와 함께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기도 하고 고리대금업을 벌이기도 하면서 세속화의 길을 걸었다.

고려 후기, 원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불교계는 여지없이 타락을 길로 빠졌고 민중의 생활을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에 사찰이 마구잡이로 지어졌다. 이에 신진 지식인들은 새로운 사상의 출현을 열망하게 되었다. 이즈음 낭송을 통해 들어온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을 강조하며 심성의 본질을 찾는 경향이 짙어 선종의 정신과 상통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많은 지식인들에게 성리학이 수용되었다. 불승들도 성리학을 공부하게 되었으며 성리학은 고려 말기에 들어와 커다란 학파로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리학자들은 처음에는 사찰을 마구잡이 짓는 일과 불승들의 비행을 지적하다가 끝내는 불교를 이단으로 모는 이단론을 제기했다. 이색, 정몽주 등은 사상적으로 성리학 이론을 전개하면서 이단인 불교를 억제해야 한다고 건의할 정도로 이들이 세력이 컸다.

이에 공민왕은 혼란스러운 사회와 사상계를 수습하고 현실을 개혁할 의지를 굳혔다. 공민왕은 두 승려를 중심으로 현실을 개혁하려 했다. 하나는 보우(普愚), 하는 변조(遍照 : 신돈의 불명, 이 이름을 쓰일 때에는 으로 발음)였다. 그러나 보우는 변조에게 밀려났다. 결국 개혁 일원에 나선 것은 변조였다.

변조는 개혁 의지에 차 있는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정치적 대권을 장악하고 불교 교단의 최고 책임을 맡았다. 변조는 계집종의 아들로 태어나 중이 되었고, 그 뒤 전국을 돌아다니며 승려와 민심의 동향을 익히 파악하고 있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스스로 그 책임자가 되어 토지제도와 개혁에 나섰다. 귀족과 사찰, 지방의 호족이 대토지를 소유하고 경제적 기반을 착취하는 수법으로 늘려가는 현실을 타개하려 한 것이다.

그의 토지개혁정책은 대단히 급진적이었다. 이에 보수세력들은 그에게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정치적 적대세력이 되었다. 그는 또 개성에 근거를 둔 귀족들의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고자 한양으로의 천도를 추진했으나 보수세력의 꾐에 빠진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또 원의 압제를 벗어나기 위해 외교정책의 수정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보우는 왕실은 비호하던 가지산파의 맥을 이었고, 원나라에 가서 불법을 배워 오기도 했고, 왕사로서 불교계의 수습과 현실개혁에도 노력했다. 그는 한때 속리산에 갇혀 지내기도 했으며 우왕 밑에서는 국사로서 불교진흥에 힘쓰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는데 이성계도 그 속에 포함된다. 변조가 급진파강경파인데 비해 보우는 온건개혁파라 하겠다.

어찌됐든 변조는 보수세력에 밀려 죽음을 당한 끝에 개혁을 중단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온갖 누명이 씌워졌다. 이성계파는 공민왕의 뒤를 이은 우왕이 변조의 아들이라고까지 모략하면서 불교개혁파인 그를 비난했다.

변조는 결국 보수세력과 유학자들에게 밀려났다. 또 사대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공민왕을 계승한 우왕은 변조의 세력을 주심으로 정책을 폈다. 이때 신흥국 명나라는 과중한 물품을 요구하기도 하고 철령 위 이북 땅을 그네들 요동에 속하게 하는 등 고려를 깔보는 행동을 취했다. 이에 최영 등은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뒤에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뒤 명나라에 글을 보내면서 우왕을 이렇게 비난했다.

 

망령되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치려 할 적에 신을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에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작은 나라로 상국의 지경을 침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대의로 타일러 곧바로 군사를 돌렸습니다. - <태조실록> 1에서

 

곧 요동에서의 회군은 사대파와 자주파의 대결이었고 유학자와 불승의 대결이었다. 끝내 정도전 일파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국제적으로는 사대주의를 표방했으며, 정치이념으로는 유학을 내걸었고, 현실정책으로는 토지제도를 개혁했다. 그리고 공민왕과 변조의 개혁정책을 여지없이 깔아뭉개고 그들의 나쁜 이미지를 조작했다. 또 불승들을 압제하면서 불교의 폐단을 과장했다. 이제 불교는 압제의 시대를 맞아 새로운 세력으로 변모해갔다.

  

타협의 길을 가다

 

조선은 건국하면서 억불숭유정책을 쓰면서 왕사제의 폐지는 물론 승려의 수와 재산을 감축했다. 이것은 사회경제적으로 당시로서는 일관성의 의미가 있었다고는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수많은 승려를 도성의 역상에 동원하기도 하고 승려를 천민의 지위로 떨어뜨리기도 했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에 일어난 불교에 대한 소박한 이단론에서 한 걸음 나아가 척불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맹자와 주자의 이단론에 근거하여 <심기이편 心氣理篇><불씨잡변>을 내놓았다. 불교는 심()만을 추구하고, 도가는 기()만을 추구하나, 유학은 두 가지를 거느리는 이()를 추구한다는 이론을 전개하면서 특히 불교에 초점을 맞추어 비난을 쏟아 부었다. 불교는 공상적이요, 비현실적이요, 비실천적이라고 매도한 것이다.

이에 정치세력으로서 탄압을 받던 불교의 대응은 너무나 타협적이었다. 15세기에 들어와 함허(涵虛)<현정론 顯正論>을 내놓았는데 정도전의 <불씨잡변>에 대한 해명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조목에 따라 불교와 육호를 대비 설명하면서, 결국 불교와 유교는 근본에서는 하나로 돌아간다고 결론지었다. 비록 그의 이론은 정연할지 모르지만 그 근본에서는 타협을 시도한 것이었다.

조선 초기부터 이런 경향은 계속되어 불승들은 유교의 경전을 부분적으로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불교와 같은 점만을 내세웠다. 또 불교는 산중으로 들어가 총림(叢林)불교로 안주하게 되었고 궁중이나 양반의 원찰로 비호받는 것에 열중했다. 뿐만 아니라 불승들도 다투어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교양을 뽐내려는 풍조도 번졌다.

이에 휴정은 이를 불식하려 하나의 시도를 벌였다. 그는 <선가귀감 禪家龜鑑>을 지어 돌리고 그 서문에 이렇게 밝혔다.

 

옛적에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행치 않았다……. 지금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은 외우는 것이 사대부의 글이요 청해 가지는 것이 사대부의 시뿐이다.

 

휴정은 이런 풍조를 개탄하여 앞에 불교의 요지를 적은 <선가귀감>을 적은 것에 이어서 <유가귀감>, <도가귀감>을 덧붙여놓았다. 여기에는 유가도가의 성격을 간략히 나타내어 불승들이 지나치게 외전(外傳)에 열중하는 풍조를 지양하려 한 면도 있고, 셋의 유사점을 나타내면서 불교 중심의 사상을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 유가에서도 외전으로 불경을 읽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비판적 안목에서 출발했다. 이에 반해 불가에서는 유가의 경서를 감히 비판하지 못하는 풍토였다. 그리하여 간접적으로 <선가귀감>이 하나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불교계는 총림불교와 함께 미륵신앙, 정토신앙이 다시 등자하게 되었다. 새로운 결사운동으로 염불결사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염불결사 다분히 민중적 요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총림불교가 타협적 노선을 걸을 때 염불결사는 미래의 이상세계의 실현을 민중의 마음에 심어주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와서 미륵신앙을 통한 변혁세력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신라 불교가 화엄학을 통한 일통(一統)사상이었다면 고려 불교는 선종과 교종의 통일을 모색했다. 그리고 조선 전기의 불교는 유불합일을 강조하면서 불교 자체에서는 선교 대립을 타파하고자 한 것이다. 비록 조일전쟁을 통해 호국불교의 전통이 재현되었지만 민중불교의 실현은 제대로 추구되지 못했다. 이런 속에서 정토신앙 또는 미륵신앙을 통한 결사가 비정통 불승들에 의해 추구되었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변혁세력으로 연결되었다.

이제가지 신라 말에서부터 조선 전기까지의 불교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조일전쟁 뒤에는 앞 시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의 변화와 불교 자체의 반성에서 나온 변화일 것이다. 그리고 불승들의 지위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도천사 승려들이 집단행동

 

이몽학은 조일전쟁 때 공을 세웠으나 출신이 서얼이라는 굴레 때문에 별다른 공훈에 오르지 못했다. 그는 고향의 도천사로 찾아가 승려들을 모아놓고 왜구의 재침을 막고 나라를 바로잡자.”라고 외쳤다. 이 절의 승려 수백 명은 여기에 동조하여 반군의 주력부대를 형성했다. 이몽학은 승려들을 휘하에 넣고 승속장군(僧俗將軍)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고을을 석권했다. 이때 밭에서 김매던 자들도 호미를 들고 따랐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수천 명의 부대를 이루었지만 끝내 좌절했다. 도천사는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도천사 승려들이 집단으로 행동을 벌인 것은 불교의 탄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승려들 사이에 낮은 신분층이 끼어들어 정통불교의 맥과 다른 유파를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점차 집단화 또는 조직화하여상당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 뒤 불교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가중하자 새로운 비밀결사운동이 번져 나갔다. 17세기 이후 민간에서는 미륵의 출현을 고대하는 미륵신앙이 팽배했다. 변혁을 꿈꾸던 승려세력은 이 미륵신앙의 분위기를 이용했다. 그리하여 <미륵하생경>을 인용하여 민중을 선동하고 미륵의 현세 출현과 그 출현과 함께 중생이 제도된다고 민중을 선동하였다. 이들 승려는 민간에서 유행했던 비밀결사인 향도(香徒)의 형식을 빌렸다. 이들 향도는 서얼 무사가 중심이 되는 검계(劍契), 노비가 중심이 되는 살주계(殺主契) 등과 일맥상통하는 계 조직원이다. 천민 서얼인 유희경 등은 풍월(風月) 향도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일부의 승려들은 용화(龍華) 향도를 결성하여 <미륵하생경>을 토대로 도중(道衆)을 모았다. 이들의 맥이 어떻게 이어 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1636년 또 한 번 변란세력과 연결되어 나타난다. 허균은 승려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관아에서 향을 사르며 예불하는 불도였던 그가 광해군 아래에서 왕조를 타도하려고 변란을 꾸몄다. 그 변란의 주도세력은 승려들과 하급 무사였다. 이 무력봉기도 사전에 탄로가 나서 불발로 그쳤지만 승려세력의 움직임이 다시 주목되었다.

1688(숙종14) 통천의 승려 여환은 미륵의 출현을 빙자하여 반역을 꾀하다가 잡혔다. 그는 경기와 황해도 일대를 횡행하여 하수인을 모아 무당과 그 아내를 정선인(鄭聖人) 또는 용녀부인(龍女夫人)이라고 부르면 민심을 충동했던 것이다. 이런 사례는 바로 용화 향도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반란에 중심에 선 지리산 승려

 

1728(영조4) 이른바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그 주모자들은 녹림취당(綠林聚黨)과의 연결을 도모했다. 그리하여 태백산 세력, 지리산 세력, 덕유산 세력의 봉기를 계획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 세력이 중심이었다. 지리산 세력은 이인좌가 청주를 석권할 때 산청 일대와 구례 연곡사, 하동 쌍계사, 순창 영취사에 취당하였다. 특히 연곡사와 쌍계사에는 수천 명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의 지휘자는 중 대유였다.

이인좌의 난이 평정된 뒤에도 이들은 할거호남(割居湖南)을 목적으로 계속 둔을 치고 모여 있었다 한다. 양반세력인 이인좌 등과 한때 손을 잡았던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다. 끝내 토벌군이 지리산에 모여들자 이들은 흩어졌고 대유는 지리산의 토굴로 숨었다고 한다. 대유가 적어도 지리산의 녹림당을 지휘했고 그 본거지가 연곡사와 쌍계사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무렵 나라에서는 <정감록>과 같은 비기류를 수색하여 불에 태우고 읽지 못하도록 엄한 금령을 내렸다. 이 일은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전국 사찰에 이들 책이 많이 감추어져 있었는데 화엄사의 승려도 감추고 있다가 발각되어 귀양을 갔다. 또 이 무렵에는 승려들이 미륵신앙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정진이 출현설과 후천개벽 도래설과도 깊은 연관을 맺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 정조 연간에는 경기와 충청도의 인사들이 하동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지리산 칠불암 등에서 지리산 세력을 끌어들여 변란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었다.

  

변란 모사

 

1851(철종2)에는 황해도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과 일대 모반을 꾀했다. 이들 주모자 유흥렴은 그의 집이나 구월산의 절에서 모의를 했는데 이 일의 모사가 성월당의 승려였다. 일이 발각되었을 때 유흥렴과 성월당은 잡히지 않았다.

1870년에는 이필제가 지리산 아래 덕산을 중심으로 변란을 꾸미고 있었는데 그들의 은신처는 지리산 속 대원암이었다. 이들이 또 문경새재에서 일을 벌일 때에 주모자의 한 사람인 정기현 형제를 충동한 것은 오대산의 중 초운이었다. 초운은 정씨 형제에게 정몽주의 후손으로 복을 누릴 것이다.”라거나 정씨 왕조에 왕이 될 운수이다.” 따위의 말로 충동질하였고 이들의 거사를 주선하기도 했다. 새재에서의 모임이 관가에 발각될 때에 이필제는 강원도로 가서 뒷날을 도모하자고 했었는데 초운은 이때 또한 잡히지 않았다.

승려를 비롯한 불도들은 여자나 남자, 재산이 있거나 없거나를 따질 것 없이 혹 보살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 처사거사도사 따위의 이름으로 방방곡곡을 누비며 화가 닥친다거나 세상이 망한다라는 말로 민심을 충동하여 반왕조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조정에서는 원래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막았지만 서울 사대문 밖에 절을 짓는 일은 허락했다. 이것은 서울의 양반집 부녀자 및 궁중의 상궁 나인들의 절 출입을 쉽게 하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이런 조치를 틈타 19세기 중엽에 와서부터 성문 바깥에는 절마다 초막을 짓고 화려하게 꾸며놓기도 하고 안에 비밀의 방을 만들어두기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선 이런 전령을 내린 적도 있었다.

 

승과 송기 구별이 없고 남녀가 섞여 살며 술과 고기가 질펀하며 비단과 보배가 놓여 있다. 그 이른바 공문(空門 : 사찰) 법계(法界 : 불법의 경계)가 놀이터로 변했다. - <포도청등록>에서

 

그 까닭은 다름이 아니었다. 이곳에는 불온한 기색을 지닌 처사들이 30~40명씩 거처하기도 하고 그 무리들 속에는 죄를 짓고 몸을 숨기는 패류(悖流)들도 끼여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들 초막을 모두 헐게 하였고 다시 초막을 짓는 승려들을 역적의 법률로 다스린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바로 이들 절이 사회불만세력이 집결한 곳임을 나타내는 것이요, 일부 승려들도 이들과 결탁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동학세력과의 연결

 

최제우는 동학을 창도하기 전에 민심을 알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길가에서 만난 노승에게서 37자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이다. 지극한 기가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기를 비옵니다.”천주를 모시면 조화가 정해지고 길이 짖지 않으면 만사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 노승이 바로 용담선사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용담선사로부터 동학의 후계인물로 사미승 서장옥을 추천받았다고 전해진다. 서장옥은 최제우를 따라 동학에 들어선 이래 동학 의식을 불교 의식으로 만들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최시형과 함께 동학을 이끌면서 동학을 현실대결 세력으로 이끌려고 한다.

최시형이 동학교도에 대한 탄압이 가해질 때나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위한 집회에서 늘 온건한 노선을 걸으며 조정에 건의하는 형식을 취할 때에 서장옥은 늘 무력 대항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최시형 계열을 좌포(坐包), 서장옥 계열을 기포(起包)라고 했다 한다.

동학과 거의 같이 일어난 정역파(正易派)의 교조 김일부(金一夫)도 승려의 가르침으로 후천개벽설을 터득했다고 전해지며, 강일순이 증산교를 창도할 때 금산사의 미륵불을 내세워 교도들을 끌어모았다고 한다. 어쨌든 동학과 승려 세력의 연결은 1894년의 농민봉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서장옥 중심의 동학세력은 끊임없이 민중봉기를 추진해왔다. 서장옥은 전라도의 손화중, 김개남, 전봉준 등과 연결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남접을 형성했다. 남접은 북접과 시국관을 달리하여 그 대처 방법을 놓고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1893년 북접 주도로 교조신원을 위한 보은집회를 벌일 때 남접은 금구, 원평에서 별도의 집회를 가졌다. 이때 남접 지도자들은 보은집회의 동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원평집회에는 많은 승려들이 끼어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갑사의 인원(仁源), 백양사의 우엽(遇葉), 선운사의 수연(水演)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호남지방의 주요 사찰을 배경으로 불교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일련의 행동을 벌인 것이다. 이들은 이런 활동을 벌이며 때로는 불명을 바꾸어 쓰기도 했다.

특히 남접 지도자들은 보은집회의 동정을 알아내기 위해 중 긍엽(亘葉)을 은밀하게 파견했다. 보은집회가 아무런 결론도 못 내리고 흩어지자 원평집회도 해산했는데 긍엽의 정보가 어느 정도 활용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뮤텔 문서에서)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남접 중 전봉준 계열의 온건파와 김개남 계열의 강경파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집강소 기간 동안 전봉준은 그들의 지휘소를 백양사에 두었다. 그리고 백양사를 중심으로 군량미의 준비에 열중했다. 김개남은 남원에 자리 잡고 전라좌도를 호령하면서 많은 양곡을 화엄사에 비축해두었다. 백양사와 화엄사는 남접 두 계열의 군사와 경제의 요새로 한몫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일과는 약간 분위기를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이른바 개화는 처음 역관, 의원, 승려 등 낮은 신분층이 활발하게 추진시켰다. 여기에 봉원사의 중 이동인(李東仁)이 핵심적인 요인으로 활약한 것이다. 그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 정계의 분위기를 읽고 일본 불교와 연결을 맺으면서 조선의 개화를 추진했다. 그가 뒤에 비록 암살당해 행방을 감추었다고는 하나 그가 뿌린 씨는 구한말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와 연관을 맺은 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가 일본에 데리고 간 조선의 승려들이 일제 침략기에 한국불교를 주도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 정통 불교가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손에서 변질되게 만들었던 것이다.

  

불교세력과 사회변동의 역할

 

이제까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건의 흐름을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보면 승려는 크든 작든 간에 변혁세력의 주체가 되거나 가담해왔음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고승대덕이라 부르는 승려들은 총림에서 용맹정진하면서 현실 도피적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었고, 권력과 세도에 빌붙은 일부의 사판중들은 재산관리에 몰두하면서 어용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 조선 후기의 양상이다.

이에 비해 변혁을 주도한 승려들은 사회의 낮은 신분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불법을 현실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요. 또 불교를 외피(外皮)로 해서 자신들의 의도를 성취하려 들었던 것이다. 속세의 천민들은 그들의 신분에 씌워진 굴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했던 것이요, 일단 출가하고 나서 어용불교의 허약함과 비리를 보고 과감히 현실대결을 벌였던 것이다. 이에 동조하거나 뒷받침한 세력들이 거사나 처사 등의 불도였다. 이들이 비록 불법에 정통하지 못한다거나 불법을 표피로 삼았다거나 불법을 방편으로 삼았다고 나무람을 들을 수는 있었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변혁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미륵신앙을 현세에 이용하는 것이 두드러진 것이다.

미륵에 대한 애기는 <미륵상생경><미륵하생경>에 담겨 있다. <미륵상생경>에서는 모든 중생이 미륵을 염원하고 십선도를 행하면 도솔천에 태어나 극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상근기(上根機)를 내세우므로 현실에 찌든 서민보다 귀족들의 신앙형태에 알맞았다.

이에 비해<미륵하생경>은 석가가 주세불인 사바세계가 끝나면 미륵불이 모든 일을 주관하는 용화세계가 열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래하생 미륵존불 當來下生彌勒尊佛>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석가가 구제하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여 현세의 낙원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표일초(表一草)미륵불은 석가불의 미완성을 완성시키며 석가불이 맡은 고통의 세계가 그 고통으로부터 완전 해방이 된 용화세계로 만들어지도록 한다는 사실은 바로 석가의 완성 자체가 미륵임을 뜻하기도 한다.”(<미륵신앙과 민중불교>)고 말했다.

이런 미륵신앙의 내용으로 인하여 주역이론을 빌려 후천개벽설을 내건 김일부도 은진미륵의 위세를 빌렸고 도교적 천지공사(天地公事)를 주재한다는 강증산(姜甑山)도 금산사 미륵의 현시라고 자처했다.

이런 불교도의 사유와 움직임은 작은 단위의 비밀결사로 이루어졌다. 그 이름이 ‘~향도또는 ‘~등으로 명명되고 조직되어 거사림(居士林)과 제휴하기도 하고 검계나 살주계 등 다른 조직과도 더러는 연계를 맺기도 했다. 이들을 당취(黨聚) 또는 땡추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그들의 조직이나 행동노선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남은 기록이 없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식별하는 신표(信標)가 있다고도 하고 조직을 이탈하거나 배반하면 가차 없는 사형(死刑)이 가해졌다고도 한다.

이 특수조직인 땡추중과 불교에 압제를 벗기려는 승려세력이 변혁활동 과정에서 자연스레 결합된 것임을 점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 승려가 봉기세력의 모사가 되는 것은 이들의 지식과 지혜가 활용되었던 것이요, 사찰의 봉기세력의 은신처가 되는 것도 지형적 조건과 함께 비밀유지나 동조세력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중 출신의 모사나 지도자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 이런 탓으로 그 실상이 기록에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분명히 조선 후기의 사회변동에 승려들의 역할은 큰 것이었는데, 그것이 역사의 미궁에 묻혀왔음을 지적해둔다.

 

-출처 : 이이화의 못다한 한국사 이야기/ 이이화/ 푸른역사